존엄한 마무리: 연명치료의 딜레마와 자기결정권의 현주소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 이 질문은 더 이상 철학적 사유에 머물지 않습니다. 첨단 의료기술이 생명의 길이를 인위적으로 연장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매우 현실적인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려는 사회적 요구는 2018년 2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연명의료결정법' 또는 '웰다잉법'의 시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법 시행 이후 수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과연 존엄한 죽음에 더 가까워졌을까요? 이 글은 연명치료의 현주소를 다각적으로 조명하며, 진정한 자기결정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를 심도 있게 짚어보고자 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죽음에 대한 성찰의 확산
숫자로 확인되는 변화의 바람. 연명의료결정법의 가장 큰 성과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의 확산입니다. 19세 이상 성인이 향후 임종 과정에 놓였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 중단 및 호스피스 이용에 대한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이 문서는,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양지로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법 시행 초기인 2018년 약 10만여 건에 불과했던 누적 작성 건수는, 2021년 8월 100만 명을 넘어섰고, 불과 2년 2개월 만인 2023년 10월에는 2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최근에는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나옵니다. 이는 삶의 존엄한 마무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누가, 왜 작성하는가? 통계를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됩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작성에 더 적극적이며, 60대 이상의 고연령층이 전체 작성자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미리 준비하려는 성숙한 인식이 고령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과 신체적, 정신적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소망이 의향서 작성의 주된 동기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단순한 법적 문서를 넘어,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하고 마지막을 설계하는 중요한 문화적 도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법과 현실의 간극: 여전히 남은 과제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연명의료결정법의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의료 현장에서는 여전히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존재합니다.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한 시점을 '임종과정'으로 매우 엄격하게 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임종과정'이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말기'와 '임종기'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환자가 원하더라도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지속하는 사례가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연명의료 중단 시점을 '말기'로 확대해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가족의 짐, 의료진의 딜레마.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 가족의 결정이 중요해집니다. 환자가 평소 뜻을 밝혔다는 가족 2인의 일치된 진술이나 가족 전원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족 간의 갈등이 발생하거나 누구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해 환자의 고통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료진 역시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습니다. 결국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형식적으로만 보장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족과 의료진에게 전가되는 구조적 문제가 여전한 것입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제언: 돌봄과 소통의 문화로
연명의료 중단을 넘어 '돌봄'으로. 존엄한 죽음은 단순히 치료를 중단하는 행위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한 이후의 '돌봄'이 더욱 중요합니다. 신체적 고통을 완화하고 심리적, 사회적, 영적 안정을 돕는 호스피스·완화의료가 그 핵심입니다. 현행법은 연명의료와 호스피스를 하나의 법률로 묶고 있지만, 개념적으로 두 제도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연명의료 중단 논의를 넘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시스템을 더욱 확충하고 접근성을 높이는 사회적 노력이 시급합니다.
소통의 부재가 빚는 비극.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소통의 부재'로 귀결됩니다. 건강할 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의 가치관을 가족과 공유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단순한 서명을 넘어, 충분한 상담과 숙고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안락사', '존엄사', '연명의료 중단' 등 혼용되는 개념들을 명확히 정리하고, 죽음에 대한 건강한 공론의 장을 지속적으로 열어나가야 합니다. 나의 삶의 마무리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선을 넘어, 삶과 죽음을 깊이 성찰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문화적 성숙이 동반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