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 |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낡은 각본: 누가 우리를 불행한 주연으로 내몰았나?
시작의 역설. 결혼이라는 제도는 본래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 안정을 꾀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사회적 계약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종종 거대한 경제적 장벽이자, 젠더 역할이라는 낡은 각본에 갇힌 비극의 서막처럼 여겨진다. 그중에서도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명제는 마치 신성불가침의 법칙처럼 우리 의식 속에 군림해왔다. 하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공식이 과연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고 있는가? 아니, 질문을 바꿔보자. 이 공식은 애초에 누구를 위한 것이었으며, 우리는 왜 이 불균형한 거래에 순응하거나 고통받아야만 하는가?
이 오래된 관습은 단순한 문화적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급격한 산업화와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가 탄생시킨 기형적 산물이며, 천정부지로 치솟은 부동산 가격 앞에서 남성에게는 감당 불가능한 족쇄를, 여성에게는 경제적 종속을 암시하는 덫을 놓는다. 이제 우리는 이 낡은 각본을 찢어버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경제적 모순과 그것이 우리 세대의 사랑과 행복, 나아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 직시해야 할 때다.
전통의 탈을 쓴 현대의 발명품
우리는 흔히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의 구도를 오랜 전통으로 착각하지만, 그 기원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조선시대의 혼례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일정 기간 머무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집안의 결합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대가족 제도 아래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했기에, 남성 측은 기존의 집에 방 한 칸을 내어주면 충분했다. 오히려 결혼 비용의 갈등은 신부 측이 준비하는 예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남성=집’ 공식이 견고해진 것은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부터다. 핵가족화가 보편화되고 아파트가 표준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결혼은 ‘새로운 집’을 마련하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사회 구조는 남성에게 ‘생계 부양자’이자 ‘가정의 기반인 집을 책임지는 주체’라는 역할을 강요했다. 반면 여성에게는 그 집을 채울 ‘혼수’와 살림을 책임지는 역할이 주어졌다. 이는 전통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성 역할을 경제적으로 분업화한 현대의 발명품에 가깝다.
숫자가 폭로하는 불균형의 심연
과거에는 가전제품이나 가구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아 혼수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 분담 구조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한 지금, 이 공식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다. 통계는 이 현실을 더욱 냉정하게 증명한다. 2023년 발표된 한 결혼정보회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신혼부부의 평균 총 결혼비용 약 3억 3,050만 원 중 주택 마련에 들어간 돈은 2억 7,977만 원에 달했다. 이는 전체 비용의 84%를 훌쩍 넘는 수치다. 반면, 혼수용품 지출은 평균 1,573만 원이었다.
이러한 비용 구조는 자연스럽게 남녀 간의 부담 격차로 이어진다. 2021년 또 다른 조사에서는 총 결혼비용 부담률이 남자 61%, 여자 39%로 나타났으며, 특히 주택 비용 부담률은 남자 67%, 여자 33%로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이처럼 수치로 명확히 드러나는 비대칭성은 ‘남자는 집’이라는 한 문장이 단순한 관습을 넘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거대한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지를 보여준다.
| 항목 | 2021년 조사 | 2022년 조사 | 2024년 조사 |
|---|---|---|---|
| 총 결혼비용 | 15,332 | 23,618 | 33,050 |
| 주택 자금 | 10,800 (70.4%) | 19,271 (81.6%) | 27,977 (84.6%) |
| 혼수용품 | 1,203 | 1,309 | 1,573 |
| 예식장 (홀) | 1,011 | 896 | 1,057 |
결혼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세대
경제적 압박의 사회적 귀결. 이 거대한 주거 비용의 압박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치솟는 집값은 혼인율과 출산율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파이터치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23년까지 아파트 매매 중위가격과 혼인 건수의 상관계수는 -0.94로, 집값이 오를수록 결혼이 줄어드는 뚜렷한 반비례 관계를 보였다. 실제로 이 기간 아파트 매매 중위가격이 63.3% 상승하는 동안 혼인 건수는 40.9%나 감소했다. 주택 가격이 두 배 상승할 때 무주택자의 결혼 확률은 최대 5.7%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러한 현실은 청년 세대, 특히 MZ세대의 결혼관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에게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이며, 개인의 행복과 성장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경제적 부담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이들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며, 비혼이나 동거 등 대안적인 관계를 모색하기도 한다. ‘남자는 집’이라는 공식은 이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묶어주는 튼튼한 동아줄이 아니라, 시작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장벽이 된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로 남성은 ‘결혼 자금 부족’을, 여성은 ‘기대에 맞는 상대가 없음’을 꼽는 현상도 결국 이 경제적 불균형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각본을 향한 움직임
다행히 이 낡은 각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비율이 미혼 남성의 79%, 미혼 여성의 72.3%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는 중요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반반 결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실제로 신혼집 비용을 여성이 분담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성 역할에 기반한 불합리한 분담이 아닌, 두 사람이 동등한 파트너로서 함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건강한 문제의식의 발현이다.
결혼은 한쪽이 마련한 무대에 다른 한쪽이 소품을 들고 들어가는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무대를 만들고, 소품을 채우고, 대본을 써 내려가는 공동의 창작 활동이어야 한다.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낡은 각본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 자리는 서로의 소득과 자산 상황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각자의 형편에 맞게 합리적으로 비용을 분담하며, 경제적 주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약속으로 채워져야 한다. 집이라는 하드웨어와 혼수라는 소프트웨어의 분담을 넘어, ‘함께’라는 가치를 중심에 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결혼이라는 무대 위에서 불행한 주연이 아닌, 행복한 동반자로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Editor: JGM A.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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