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 학점제 |
선택의 역설: 고교학점제, 자유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불안
2025년,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변모한다. 학생 개개인의 진로와 적성에 맞춰 시간표를 직접 설계하는 '고교학점제'의 전면 시행은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에 던지는 담대한 도전장이었다. 그 이상은 숭고했다. 대학 강의실에서나 볼 수 있던 자율적 과목 선택권을 고등학생에게 부여함으로써, 주입식 교육의 굴레를 벗고 자기주도적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청사진은 모두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제도 시행의 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지금, 교육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대보다는 혼란과 불안에 가깝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되려 '선택의 압박'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낳고 있으며, 이들을 지도해야 할 교사들은 제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성장통이 아니다. 고교학점제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어쩌면 자유의 이름으로 새로운 형태의 불안과 불평등을 제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질적인 문제는 고교학점제가 '진로 결정'이라는 고도의 과업을 아직 미성숙한 1학년 학생들에게 너무 이른 시점에 강요한다는 데 있다. 한 교원단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1 학생의 53.4%가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기 어렵다고 답했으며, 심지어 3명 중 1명은 과목 선택에 대한 부담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충격적인 수치다. 자신의 정체성조차 확립되지 않은 시기에, 대학 입시와 직결되는 과목 선택을 강요받는 학생들은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탐색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내신에 유리한 과목'이나 '인기 학과 진학에 필요한 과목'으로 내몰리고 있다. 결국 학생 맞춤형 교육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퇴색하고, 입시 경쟁은 더욱 교묘하고 치열한 형태로 변질될 뿐이다.
이상과 현실의 불협화음: 교실 붕괴와 교사의 소진
학생들의 혼란은 고스란히 교사들의 부담으로 전이된다. 고교학점제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선택과목 개설이 필수적이지만, 이는 교사 수급 문제와 직결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교사 67.2%가 다양한 과목 개설을 위한 교사 수급이 불가능하다고 응답했다. 현실적으로 신규 교원 충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기존 교사들은 1인당 2~3개 이상의 과목을 담당하며 수업의 질 저하를 우려하고 있다. 한 교사가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과목까지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며, 이는 전문성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사들은 폭증하는 행정 업무와 학생 개개인의 복잡해진 시간표 관리, 출결 확인, 생활기록부 작성 부담 등으로 인해 정작 중요한 수업 연구와 학생 상담에는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을 토로한다. 한 설문에서는 교사 94% 이상이 고교학점제로 인해 업무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응답했다.
평가 제도의 모순. 고교학점제는 본래 절대평가(성취평가제)를 전제로 설계되었다. 학생이 자신의 진로에 따라 소신껏 과목을 선택하려면, 수강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내신 등급에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28학년도 대입 개편안은 여전히 주요 과목에 대해 5등급 상대평가를 병기하도록 하고 있어, 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진정한 흥미보다 등급 획득이 용이한 과목으로 쏠리는 현상이 심화되고, 학교 현장에서는 절대평가와 상대평가가 혼재하는 기형적인 평가 시스템으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성취 수준을 평가하겠다면서 동시에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상대평가를 유지하는 것은 정책적 엇박자이자 명백한 모순이다.
결국 고교학점제는 학교 현장에 '선택권'이라는 화두를 던졌지만,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할 실질적인 인프라와 제도는 마련하지 못했다. 학교 규모와 지역에 따른 교육 격차는 더욱 심화될 우려가 크다. 대도시의 자사고나 대규모 학교는 100개가 넘는 과목을 개설하며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지만, 농산어촌이나 소규모 학교는 교사 부족으로 필수 과목 외에 다양한 과목을 개설할 여력이 없다. 이는 교육의 기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고교학점제가 새로운 '교육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학생과 교사가 직면한 딜레마: 데이터로 보는 현장의 목소리
학생과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주관적인 호소가 아니다. 여러 설문조사와 통계는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이상적인 목표와 현실적인 문제 사이의 간극은 아래 표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 핵심 쟁점 | 학생 측면의 문제점 | 교사 측면의 문제점 |
|---|---|---|
| 진로 결정 압박 | 고1 시점에서의 진로 미결정(응답자 53.4%가 어려움 호소). 과목 선택 실패 시 진로 변경의 어려움으로 인한 자퇴 고려(33.5%가 경험). | 진로 미결정 학생 대상의 상담 및 지도 부담 가중. 학생들의 잦은 진로 변경 요청에 대한 행정적 처리의 어려움. |
| 과목 선택의 왜곡 | 내신 유불리에 따른 전략적 과목 선택(45%가 고려). 진로 관련 심화과목보다 등급 취득이 쉬운 과목으로 쏠림 현상. | 소수 학생이 선택하는 비인기 과목의 폐강 위기. 교사의 수업 전문성과 무관하게 학생 수요에 따라 과목을 개설해야 하는 압박. |
| 평가 방식의 혼란 | 절대평가 취지와 달리 상대평가 등급 경쟁 지속. 과도한 수행평가 부담으로 학업 스트레스 증가. | 다과목 지도에 따른 평가 업무 폭증.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병행으로 인한 평가의 이중 부담. 성적 부풀리기 우려 및 변별력 확보의 어려움. |
| 교육 격차 심화 | 학교 규모 및 지역에 따른 과목 개설 수 차이(80.9%가 불공평 인식). 사교육 컨설팅 의존도 심화(70.1%가 필요성 느낌). | 소규모 학교의 교사 부족으로 인한 과목 개설 한계. 다과목 지도로 인한 수업의 질 저하 우려(86.4%). |
| 학교 공동체 약화 | 이동 수업으로 인한 소속감 저하(23.6%만 소속감 느낌). 개인화된 시간표로 인한 학급 공동체 의식 약화. | 기존 담임 중심의 학생 생활지도 시스템 붕괴. 학생 개개인의 출결 및 생활 파악의 어려움 증가. |
표류하는 교육개혁, 나아갈 길을 묻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중심 교육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필연적인 흐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방식은 학생과 교사 모두를 '선택'이라는 미명 아래 불안과 소진으로 내몰고 있다. 제도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더 이상 이상적인 구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가 제도의 정상화다.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신 절대평가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학생들이 성적 유불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과목을 탐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교원 수급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 마련 또한 절실하다. 단순히 교사 한 명에게 여러 과목을 맡기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정규 교원을 확충하고 순회교사제나 온라인 공동 교육과정의 내실화를 통해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아울러, 중학교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인 진로 교육을 강화하여 학생들이 충분한 정보와 고민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과목 선택에 임할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학생이 자신의 시간표를 짜는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부담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교육 시스템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자율이라는 이름이 방임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선택이라는 기회가 불안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교학점제라는 거대한 실험이 성공하기 위한 열쇠는, 정책의 화려한 청사진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ditor: JGM A.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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